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우스 2세 (문단 편집) === 의심 많은 황제 ===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밑에서 관료생활을 한,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평가처럼 명민하고 성실한 행정가이자 황제였다. 그렇지만 후기 로마 제국 기준이 아닌 현대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본인이 가진 역량, 안정성에 해가 갈 만큼의 결함이 분명했다. 그것은 그가 예민하고 의심 많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서 묘사되듯,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음험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물론 당시 로마 제국 황제들에게 있어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의 경쟁자는 황위 찬탈을 시도하는 반란자들이었지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이 아니었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유능한 장군들과 억울한 희생자가 한둘도 아니고 연좌제로 잠재적 정적, 반란자와 그들의 가족, 부하, 노예들까지 여럿 제거한 경우는, 콘스탄티우스 2세 뿐이다.[* 유능한 지휘관으로서 멀쩡히 알레만니 족 토벌을 잘하고 있던 [[클라우디우스 실바누스]]를 신하들의 모함만 믿고 잡아죽이려 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 실바누스가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되기도 했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 동안 장교들과 관료들은 승진을 위해서 상급자를 밀고하는 것이 횡행했다고 한다. 당시 '해몽 백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한 밀고자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털어놓은 꿈 이야기를 황위에 대한 야망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재주가 있어서 많은 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신뢰하던 신하 '쇠사슬 파울루스'라는 관리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날조한 증거를 들이대며 절대 빠져나갈 수 없도록 옥죄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토대로 유추해보면,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분명코 말해 의심 많고 음험하면서도 영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건 3~4세기 황제 기준으로도 어느 정도 정상은 아니었다. 군인 황제 시기로 불린 3세기 동안, 아니 그 이전인 [[세베루스 왕조]] 후기인 [[율리아 마마이아]]가 권세를 휘두를 무렵부터 로마 정치계는 배신, 음모, 술수가 난무했다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분명 지나친 면이 많았다. 더욱이 그의 제위는 군인 황제 시기 황제들처럼 군권을 쥔 야심 많은 장군이나, 권모술수에 능한 3세기 원로원의 행태로 흔들릴 확률이 적었다. 이는 부황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래에서 정리되고 개혁되면서, 지나친 숙청을 굳이 벌일 이유가 적었다는 말이 된다. 1세기 중반의 [[칼리굴라]]처럼 숙부 [[클라우디우스 1세]],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고모부 [[소 드루수스]], 이들을 따른 인사들의 비호 외엔 10대부터 늘 암살, 궁중음모 속에서 자기경계, 냉혹한 보복을 '본인과 가문의 존속을 위한' 숙명으로 받아들일 분위기도 아니었다. 즉, 제위를 지키기 위해 억지로 죄를 만들어 잠재적 정적으로 '의심'될 만한 이들을 옥죄거나 제거할 이유가 적었다는 말이다. 즉, 주관적, 객관적 이유를 근거로 볼때 이 정도라면 개인 성격 문제라고밖엔 할 수가 없다.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1세 같은 경우도 억울하게 죽었다고 할 수 있는 자는 [[크리스푸스]] 뿐이며 이마저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반론이 있다. 동서고금의 군주 중 음험하고 의심 많은 이들이 늘 그렇듯,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의심과 주관적 예측만으로 직방계 혈육들을 계속 옥죄였다. 그는 과도한 친족 숙청으로 제위 승계 인재풀을 줄였고, 살아남은 친족들도 자기 통제 안에 넣고 이마저도 의심하고 처벌했다. 이렇게 되니 그가 급사했을때, 마땅한 제위계승자들은 거진 사라지거나 있어도 콘스탄티우스 2세 생전부터 여러 리스크를 안고 제위를 이어야 했다. 결국 이런 결함으로 말미암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위업, 노력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단명하고 만다. 어떻게 보면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라는 제대로 된 정통성 있는 후계자들이 요절, 간신 [[세야누스]]의 궁중음모, [[네로]]와 [[세네카]]의 숙청계획과 의도적인 경쟁자 제거 등으로 사라지면서 단명하게 된 이유와 비슷하다. 그의 시대인 후기 로마 제국은 혼자 다스리기에는 너무 광범위하였고, 동시대 한-위진 제국 혹은 훨씬 훗날의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행정 체계도 발달이 덜 되어, 그 한계가 명확했다. 제 아무리 프리키파투스보다 도미나투스 아래에서의 황제가 절대적이라고 해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 제국을 도저히 혼자 다스릴 순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협력자는 필수였고, 그 대상자가 친족이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안정성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광 아래 견고했다. 허나 그의 예민함과 의심은 이런 이점을 갉아 먹고 말았다. 더 비극이 된 것은 남은 남자 황족이 본인이 숙청한 숙부의 아들들인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였다는 현실이었다. 이는 의심 많고 예민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이들을 계속 감시하고 의심한 이유가 됐다. 즉, 그나마 부황인 대제의 혈육이라는 타고난 정통성을 앞세울 대타조차도, 콘스탄티우스의 직간접적인 견제와 의심으로 언제 죽을지 몰랐던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개인적인 측면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의 성격적 결함이 큰 단점이라고 해도, 그가 상당히 영리하고, 네로처럼 즉흥적이지 않았던 부분일 것이다. 어쩌면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처럼 예민하고 냉정하면서도 의심있는 면이 더 강했던 황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 모른다. 따라서 그는 네로처럼 세네카, 부루스, 티겔리누스 같은 권신이나 간신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황제였고, 이 점은 제국에게 마냥 해가 되지 않았다. 허나 이런 단점은, 상술했듯이 아우구스투스의 후광 이상을 갖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왕조가 콘스탄티우스 2세 생전부터 여러 위험요소를 갖고 단명한 이유가 됐다. 당장, 황실 존속에 필수인, 정제-부제 협력 체제가 잘 굴러갈 수 없게끔 됐다. 그는 갈루스를 결국엔 부제로 삼았지만, 기어오른다는 핑계로 숙청했다. 이런 근시적인 숙청은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기엔 역부족인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더 재미난 사실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명민하고 평균이상의 정치, 행정적 감각을 가지고 있어 다시금 협력자가 필요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필연적으로 마지막 남은 혈육인, 갈루스의 동생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야 됐다. 허나 아무리 율리아누스가 순종적이고 딴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 선례는 종국적으로 협력자, 후계자이며 부제인 율리아누스와 그 휘하 관료, 장군들이 콘스탄티우스 2세를 경계한 원인이 됐다. 사실 이복형제라고 해도 친형과 다름없는 갈루스가 제거된 것을 본 이상, 율리아누스 입장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여겨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별 할말이 없다. 따라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이 벌인 여러 행보 때문에 본인 스스로 경계를 끊임없이 해야 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은 근시적인 이득만 쫒은 본인이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비난 속에서, 그가 꽤나 명민한 황제임에도 제 스스로 저평가받게 만든 제1원인이 됐다. 실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의 급성장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페르시아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무리하게 율리아누스의 정예병 절반을 압수하려고 했다. 이에 서방 출신자가 많아서 고향과 지나치게 먼 동쪽 끝의 페르시아 전선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던 율리아누스의 군사들은 반발했고, 결국 제국은 다시금 내전 상황이 일어나게 됐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에 여러 번 반란이 일어난것도 콘스탄티우스 2세 특유의 의심병 지분이 상당하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에겐 인내심, 조직력, 결단력, 책임감이란 강점이 있었고, 율리아누스의 반란 외엔 모든 반란 진압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장점들은 후술할 단원들에서 드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